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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강동이, 2018학년도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통역전공 합격
수강강좌(교수님)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통역전공(이창용어학원) 평  가 ★
등록일 2018.01.10 조회수 7,708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1. 먼저간단한합격소감을들려주세요.

 

사실 이번 시험을 준비하면서 공사가 다망하였으며실질적인 수험기간도 실질적으로는 3개월 정도로 짧았으며 절대적인 공부량이 하루 2-3시간 남짓 정도로 부족하고 스터디도 하나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해서 ‘과연 괜찮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합격하게 되어 기쁩니다.
 
2. 시험당일, 어떤마음으로어떤준비를했나요?
 
# 1차시험당일
1차 시험 전날에 일찍 자고 (오후 10시) 늦게 깼습니다 (오전 9시). 전날 기분 좋은 생각을 하고 자서일까, 깨자마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혼자 계란토스트를 해서 커피와 먹고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학교에 왔습니다.
학교에 와서 든 기분은 ‘정말 기묘하다’ 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제가 2012년도부터 평소에 다니던 학교 스타벅스와 인문관 건물에 너무나도 익숙한 학원 사람들이 그득했기 때문입니다. 스타벅스와 인문관 복도에서 ‘아이쿠 안녕하세요’ 하고 목례만 천 번 한 것 같습니다. 평소의 긴장감 넘치는 학원 분위기도 아니고 다들 서로 인사하고 화기애애하게 덕담을 나누고 격려하는 분위기여서 아침의 좋았던 기분이 지속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Ed Sheeran의 Shirtsleeves를 들으며 핸드폰 갤러리에 모은 예쁜 추억들을 돌이켜보았습니다.
그리고 2번 문항 시험지를 받아들었는데 익숙한 텍스트가 있어서 정말 놀랐습니다. 아마 수업 시간 자료는 받아서 읽은 적은 있지만 제가 가지 않았던.. 수업에서 나온 지문인 것 같았는데 ‘어차피 좋은 글은알아보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듣기 문항이 나올 때까지 괜히 스트레스 받기 싫어서 글은 덮어놓고 읽지 않았습니다.
듣기 지문은 나중에 듣기로는 길었다고 했는데 사실 집중해서 들어서 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미국의 젊은 성인들이 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지에 대한 지문이었는데, 도중 숫자가 많이 나와서 아예 숫자는 빼고 개략적인 틀을 잡아서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1-1은 요약 내용이어서 평이했고, 1-2 역시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가? 왜?’ 여서 ‘그렇다’고 하고 평소에 신문에서 보고 주변에서 본 현상과 생각을 첨가해 썼습니다.
2-1 역시 요약이어서 평이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1-2, 2-1, 2-2 모두에서 개인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것은 평소에 개인적으로 공부한 고급 어휘를 많이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좋은 어휘만 쓰면 몇 마디로 할 수 있는 말을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평소에 워드스마트에서 외웠고 확실하게 용법을 아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평소에 어휘를 많이 외워서 누군가가 옆에서 단어 하나하나 쥐어주는 것처럼 술술 쓰였습니다.
2-2 첫 문장은 지금도 제 앞에 쓰여진 것처럼 분명히 기억이 납니다. ‘Prometheus was punished by the gods for giving the gift of knowledge to man’. 이 문장을 쓰고 ‘아 이 에세이는 루비콘 강을 건너버렸다’ 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평소에 과외 학생 미국 대입 글쓰기 과외하며 글쓰던 습관이나 타임지에서 읽어서 필사한 구절이 나온 것 같았는데, 한참 고민하다 버리기에는 좋은 문장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이 문장 위에 줄을 그어서 삭제하기보다는입을 열어서 젊은이들을 계몽할 수 있는 한국의 젊은 IT CEO를 인간에게 지식의 힘을 주어서 신들의 분노를 산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해 글을 썼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유니크하게 인문학적 소양이 드러나는 글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이걸 채점하는 교수님들께서 이걸 좋아하실까? 완전 도박인데? 주제넘은 글을 쓴 거 아냐? 아 양시래선생님이 무리수 던지지 말랬는데 나는 또 기어이…하는 생각에 1차 결과가 나올 때까지 괴로웠습니다. 괜히 더 괴로울까봐 내용을 복기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후문 흡연구역에 내려오니 저희 학원 사람들을 잔뜩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외대 앞 술집 어디든 들어가도 심란한 저희 학원 사람들과 합석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관상가 양반, 내가 통역사가 될 상인가?!’를 외치며 그 날 다양한 사람들과 4차까지 달렸습니다.. 1차 시험 끝나고 심란한 건 모두가 같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1차 시험 합격발표는 스터디파트너 민영이와 잠실역 홈플러스에서 확인했는데 보고도 믿기지 않아 애완동물 코너 앞에서 스터디파트너와 통곡하면서 울던 기억이 납니다. 최종합격도 1차합격만큼 기쁘진 않았습니다. 제가 쓴 글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아서 기뻤습니다.
 
# 2차시험당일
2차 시험 전날에는 무언가 기억할 수 없는, 아마도 사소한 이유로 늦게 자서 조금 찌뿌드드하게 새벽에 깼습니다.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아서 ‘오늘 통역 제대로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편치 않은 상태로 학교에 갔습니다. 밥도 못 먹었고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마시면서 스터디 파트너와 입을 풀었습니다. 복장은 스터디파트너와 둘 다 칼 정장을 입었습니다. 정장이 어색했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격식 없는 복장을 입지는 않았고 항상 힐을 신고 다녀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애경홀에서 대기하게 되었는데 안내 전 대기시간도 길고, 익숙한 얼굴이 꽤 보였습니다. 1차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꽤나 학원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모르지만 저를 알아봐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화기애애하게 서로 덕담을 나눴습니다. 학교 수업시간에 만난 분과도 인사해 서로 잘하는 점을 짚어주고, 학원 수업시간에 만난 분과도 ‘평소에 잘하셔서’‘얼굴이 면접 프리패스상’‘why are you so gorgeous?’와 같은 덕담을 나눴습니다. 이 시간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짧게 대기한 편인데 이 시간 동안 자리 여기저기 오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기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When it comes, I’m ready’, ‘Sky above me, ground under me, fire within me’ 와 같은 구절을 몇 번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제 이름이 호명되고, 크게 놀라거나 ‘아 안되는데’ 보다는 밑도 끝도 없이 아는 사람들에게 ‘다들 잘 될낍니다!’ 하고 외치며 패기넘치게 크게 손을 흔들고,시계가 없는 스터디파트너에게 손목시계를 풀어주고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진행요원 선배님 역시 저희 학부이자 동아리 선배님이셔서 마지막 순간까지 농담을 나누고, 옷차림을 고치고 긍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태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면접장은 복도와 체감온도가 10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싸늘해요. 중앙에는 여자교수님께서, 좌측에는 어딘가에서 많이 뵌 남자교수님께서, 우측에는 외국인 교수님께서 앉아계셨습니다. 좌측 교수님이 제가 책도 사서 읽고, 홈페이지도 들어가서 보았던 곽중철 교수님이라는 것을 면접이 끝나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들어가자마자 곽중철 교수님께서 ‘자, 스트레칭이라도 해보게!’ 라고 하셔서 주눅든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어 정장에 12센티 하이힐 차림으로 크게 허리를 굽히고 팔을 펴며 체조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 이제 준비되었습니다!’ 라고 하자 곽중철 교수님께서 제 서류를 살피시며 ‘동이씨 무서운 사람이네, 용인외고 출신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단순히 ‘네 그렇습니다’하고 끝내고 싶지 않아서 바로 ‘네, 동원재단 밑에서 9년을 공부했습니다. 너무 좋아서 2년 더 저의 학업을 응원하는 동원재단에서 수학하려고 합니다’ 라고 맞받아쳤습니다. 또 ‘아, 면접까지 루비콘 강을 건너버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굉장한 무리수라는 것을 알아서 살짝 긴장이 풀린 것 같기도 하고 더 긴장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여기까지의 분위기는 아이스브레이킹이라기보다는 사실 고압적입니다. 여기서 중앙에 계신 여자교수님께서 ‘자기소개를 해보세요’ 라고 하셔서 그간 제가 번역과 통역을 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영어로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번역한 매뉴얼과 패키징의 제품이 코트라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로 수출되는 느낌, 교보문고에 갔더니 제가 설명을 번역한 책이 베스트셀러로 진열된 것을 본 느낌, 제가 한 번역이 우리나라 제품의 수출에 도움이 되고,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이 영어로 번역되어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느낌.. 자기소개를 준비하지는 않았었는데 이 말을 하면서 뭔가 뭉클하고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9년간 쌓아온 것들이 주마등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애경홀에서 되뇌이던 ‘when it comes, I’m ready’가 떠오르고 비장하게 바로 통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영한 내용은 혹등고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평이한 주제가 나와서 맥이 빠지기도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자마자 뜸들임 없이 통역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문장이 깨지는 부분 없이 잘 나와서 오 괜찮았다 싶었는데 바로 곽중철 교수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주시고 싶으셨던 것인지, 아니면 저의 미숙함을 꾸짖고자 하셨던 것인지 ‘혹시 자네 혹등고래 무리의 유행에 대한 부분은 못 들었나?’ 라고 하셔서 또 ‘기억이 납니다! 언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치고 그 부분을 통역했습니다. 제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맥없이 ‘아… 죄송합니다..’ 라고 하기보다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부분이 좋은 인상을 남겼기를 바랍니다.
한영 내용은 최근에 개가 사람을 물어서 죽인 내용이었습니다. 평소에 연습하던 지문에는 ‘나는’ 이라고 자기 자신을 칭하는 1인칭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 지문에서는 나와서 이 부분을 깔끔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도 교수님이 읽어주시는 것이 끝나자마자 뜸들임 없이 바로 통역을 시작했습니다. 영한과 달리 이번에는 그 어떤 내용도 놓치지 않았고 그 어느 문장도 문법 깨짐이 없었습니다. Pause 없었습니다. Backtracking 없었습니다. 통역하며 세 교수님 모두와 눈을 일정 기간 동안 마주치려고 노력했으며 눈알을 굴리거나 먼산을 보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평소에 자신감이 공격적인 목소리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서 일부러 미소를 띄고 목소리가 너무 격양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드라이하지 않게 필요한 부분에 피아니시모, 포르테 강조점 확실히 넣어서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니 너무 허무했습니다. 이전에도 ‘면접이 끝나고 나면
‘안녕하세요’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고 ‘안녕히 계세요’ 하고 문을 닫고 나온 기억만 남을 것’이라는 말을 계속 들었지만… 정말로 찰나에 끝나버려서 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나오니 진행요원인 선배님께서 ‘아니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렇게 오래 걸려?’라고 해서 갸우뚱한 기억이 납니다. Time flies. 개인적으로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면접장에서 나오니 손바닥에 박힌 굳은 살을 제가 모르는 사이 다 뜯어내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면접이 끝났는데 11시도 채 되지 않아서 멍하니 국제관 앞 계단에 앉아있다가 나오시는 다른 학원 분들과 인사하고, 근처에 사는 학교 친구를 불러서 닭갈비를 먹고 정장을 입은 채 놀러갔습니다. 그리고 보름 동안의 칩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 통번역대학원진학을결심하게된동기는무엇인가요?
요 몇 년 동안 생계를 번역/통역으로 꾸려나갔는데 어느날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학교 교수님들도 너무나도 통대 진학을 당연하게 여기셨고 무언가 제게 정해진 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유 제가 무슨 대학원이에요’라고 했지만 올해 3월 어느날부터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번역과가 아니라 통번역과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5월에 제가 일하던 어느 회사 바이어 미팅 통역을 다녀오고 나서 굳혔습니다.
 모교의 교수님 모두 제가 닮고 싶은 분들이었기에 다른 곳 생각 없이 오직 외대 원서만 접수했습니다.
 
4. 입시준비를시작할때자신의영어실력은어느정도였다고생각하나요?
저는 고등학교도, 대학도 영어특기자로 합격했습니다. 어느 집단에 소속되든‘영어 잘하는 애’ 꼬리표가 붙었고 그것 때문에 9년 동안 더욱 영어에 매달리고 박차를 가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입시를 시작할 때 딱히 문법적인 오류나 독해와 듣기가 안되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글은 어딜 가든 항상 독특하게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단/복수, 관사 절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학교 수업은 빠짐없이 큰 노력 없이 모두 A+을 받았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로 영어를 잘 해야 합격선인지 몰라서 계속 불안했습니다.
노트테이킹 없는 통역을 한 적이 없어서 메모리가 항상 문제였습니다. 통대입시 영어는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새로웠고 김태훈 선생님 수업 청강 들어가서 ‘어 뭐야 우리 집이 시각적으로 상상이 안되는데…? 2분짜리 passage를 시각적으로 외우라고? 다들 이걸 한단 말이야? 어떻게? 이게 말이 된다고?’ 하고 충격 받아서 울먹이면서 뛰쳐나오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간의 절제되지 않은, superfluous한 영어를 길들이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습니다. 
 
5. 영어공부경력 (영어전공, 어학연수, 영어권국가거주, 영어활용업무등)은어느정도였나요?
저는 경기도 모 외고 국제반을 다녔습니다. 영어로 영문학, 사회학, 생물, 물리, 심리학 등 다양한 과목을 공부했습니다. 입시도 미국입시를 해서 SAT와 AP 공부를 했습니다. 영어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의 기초는 이 시기에 다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코엑스에서 열린 한중남미 고위급 포럼에서 부스 안에서 통역하는 분들을 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통역 경력을 쌓게 됩니다. 6.25 전쟁 20주기 지평리전투 행사였는데, 이때 끄억끄억 울어가면서 참전용사분들 통역을 처음 하고 이 분들께서 말씀하시는 절절한 감정까지 통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전적인 이유로 미국 대학 진학이 좌절되고 갑작스럽게 한국의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이 되어서 저는 학교에 애정도 관심도 없으니저희 학교에 영어통번역학과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은 누구보다도 저의 모교를 사랑합니다. 저는 원래 경영학이 1전공이었고 경제학이 2전공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은 너무 어려웠으며학사경고를 맞고 3학년이 되며 저는 ‘이렇게 되면 취업도 안되니 학점이라도 올리자’는 생각으로 이중전공을 영어통번역학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처음에 가졌던 생각에 비해 영어통번역학과 공부는 굉장히 수월했고 웬만한 수업은 큰 노력 없이 전부 A+ 학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학부 시절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 번역을 많이 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께서 금전적인 지원을 끊으셔서 일거리를 계속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굵직굵직한 번역을 고등학교 인맥을 통해 받을 수 있어서 이력서를 채워넣고 나름 자신있는 번역 분야가 생겨서 입에 풀칠을 하고 학비와 생활비를 댈 수 있었습니다.
20세에는 EIDF행사에서 통역을 맡았고, 21세에는 신풍제약 임상실험 번역을 맡았으며, 22세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정식 통역사로 시사회 GV통역을 맡았습니다. 24세에는 집안 사정상 휴학하고 하루종일 번역만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엄마가 제가 어린 나이에 ‘선생님’ 소리를 들어가며 일하는 것을 보고 뿌듯해하시는 것이 기뻤고, 매주 번 돈을 굵은 만원짜리 지폐 뭉치로 인출해 엄마 아버지 용돈 드리는 낙에 살았습니다. 25세가 되고서는 그간 금발 염색 때문에 거절했던 통역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대학교 시절에는 늘 번역과 통역을 한 것 같습니다.
과외도 계속 했습니다. 입시를 할 즈음에는 강남 부잣집 자제분들 대상으로 미국 대학 진학용 에세이와 SAT 에세이 과외를 했습니다. 인문학적인 소양과 창의성이 많이 필요한 유형의 글들이었는데, 이런 과외가 제 입시의 확장 글쓰기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과외 역시 우리 자제분들 미국 대학 입시 실패하면 제 밥줄 끊긴다는 타는 듯한 괴로움으로 했습니다. 매일 헤밍웨이처럼 글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고 또 빌었습니다. 우리 학생분들 출국하는 9월까지는 본격적으로 입시를 하기보다는 이런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크게 도움도 되었지만 실패할 수 없다는 부담감으로도 작용했습니다.
 
6. 입시를준비를시작할때다짐했던것이나마음자세등어떤생각을했나요?
‘시험 생각을 크게 하지 말자’와 ‘이 시험에서 낙방하면 정말로 갈 곳이 마포대교 밖에는 없다’는 두 가지의 공존하지만 충돌하는 생각을 갖고 수험생활에 임했습니다. 입시를 하면서 가장 부담스러웠던 점은 입시에 실패하면 그동안 했던 모든 일이 부정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나는 번역사/통역사로써의 자질이 충분한가?’하는 의문을 갖고 살았고 그것 때문에 정말 괴로웠는데 그것을 근본부터 부정당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제가 잘하는 것이 영어밖에 없는 것 같아서 괴로웠고, 또 저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노력하는 자는 천재를 이기고, 즐기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이긴다고 하지만 저는 그 무엇도 아니고 영어 밖에 재능도 없어서 이거 아니면 굶어죽는 절박한 자인 것 같아매일 괴로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합격은 더욱 더 다행스런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자고 생각해서 9월부터는 일도 안 하고 그간 일하며 모아둔 돈을 펑펑 써가면서 입시했습니다. 공부하면서 단 것이 먹고 싶으면 딱 한 입을 먹고 버리더라도 도넛을 사서 먹었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고민 없이 샀습니다. 옷도 항상 남루함 없이 입고 매 주 잠실 롯데월드몰에서 쇼핑도 하고 좋아하는 화장품 브랜드 신상이 나오면 꼭 사고 매일 아침 화장도 꼭 했습니다. 2주마다 젤네일도 받고 속눈썹 연장도 받았습니다. 1차 시험 3일 전에는 뭔가 불안한데 할 수 잆는 것이 없어서 학원 끝나고 1시부터 친구와 롯데월드에 가서 실컷 놀았습니다. 이런 여한과 스트레스가 없는 생활양식이 시원시원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길을 걸으면서도 머릿속으로 그 날의 통역 내용을 복기하면서 아쉬운 부분과 좋았던 점을 되새겼습니다. 머릿속으로 계속 권투하듯이 습관처럼 통역 생각을 한 것이 크게 연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책상에 앉아서 하는 복습은 딱히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7. 특별히이창용어학원을선택한이유가있다면?
사실 6월 말에 처음 학원에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많은 학교 학우들이 다녔던 강남의 다른 학원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원이 5월 말에 폐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결국 이창용어학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학원으로 오는 언덕을 오르다가 저는 저희 한국외국어대학교 TIME 동아리 선배님이신 한 김태훈 선배님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4년 전에 저희 동아리에 오셔서 해주신 강의와 프로페셔널한 태도가 너무나도 인상 깊게 남아있었기에 ‘아 이 선배님께서 일하시는 학원이면 이미 검증되어 믿을만하다, 괜히 다른 학원 가려고 했네ㅋㅋㅋㅋㅋ 이런 silly me ㅋㅋㅋㅋㅋ’ 하고 청강 없이 바로 데스크에서 ‘일시불이요’ 하고수강신청했습니다.
 
8. 공부를하면서쌓은나만의입시공부노하우가있다면?
( WRITING / SPEAKING / NOTE-TAKING등영역별공부방법및기타노하우)
Writing –라이팅 공부는 1차 관문이라는 생각에 마지막 한 달 동안 굉장히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지향한글쓰기는 군더더기 없는, 컴팩트한 글쓰기였습니다. 매일 헤밍웨이처럼 남성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무의미한 공간만 채우는 말이나 tautology를 늘어놓기보다는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휘와 문장구조에 상당히 신경을 썼습니다. 어떤 부분은 pianissimo로 글을 쓰고, 어떤 부분은 forte로 강조해 글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읽는 맛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좋은 구절이 있으면 메모하고,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이 있으면 크게 읽어보고, 말하다가 좋은 구절이 나오면 메모했습니다. 몰래 학원 교실 뒤에서 들고 간 큰 종이뭉치에 끊임없이 글을 쓰고, 셀프 첨삭하고, 찢고, 좌절하고, 또 썼습니다. 글을 쓰고는 ‘진짜? 이렇게 생각해? 이게 의미가 있어? 단순히 읽을 때 이쁘게 들리는 무의미한 글 쓴 거 아냐?’ 하고 몇 번씩 쓴 문장을 읽었습니다. 라이팅 공부는 정말 도자기를 빚고 ‘이것도 아냐!’ 하고 방금 빚은 도자기를 깨부수는 도공의 심경으로 했습니다. 단순히 예쁜 글이 아니라 예쁘기도 하지만 의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Speaking – 스피킹은 정말 당일의 컨디션과 기분, 그리고 자신감이 크게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매 수업 들어가기 전에 꼭 혼자 이어폰 끼고 큰 소리로 입 풀고,
엘리자베스 1세의 Tilbury Speech를 꼭 읊고 들어갔습니다. Tilbury Speech는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 함대의 침공에 맞서 싸우기 전Tilbury에서 한 연설입니다. ‘I may have the body of a weak and feeble woman, but I have the heart and stomach of a king!’ 부분이 연설의 킬링파트인데 이 부분만 읊고 가도 자신감이 1,000%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피킹 부분은 제가 번역을 주로 많이 하다가 통역으로 옮겨와서인지 머릿속에서 들은 내용을 번역해 유려하고 완벽하게 말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은 꽤 정교하고 문장이 이쁘게 나오지만 내용이 많이 누락되거나 아예 훅 날아가는 부분이 있어서 머릿속의 내용을 읊기보다는 앞에 있는 대상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시작과 끝을 임팩트 있게 귀결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Note-Taking –노트테이킹 연습은 학교 수업시간에 이미 많이 해서 딱히 별도로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노트테이킹이라는 것이 원래 개인적인 것이어서 도움이 될까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어로 내용을 듣더라도 영어로 note-taking을 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것보다 영어를 쓰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라고 느꼈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를 쓰는 것이 글을 쓸 때도 바로 가져다 쓸 수 있으니 더욱 시간을 단축시킨다고 느껴졌습니다.
 
9. 이창용어학원에서본인에게가장도움됐던수업과그이유는무엇인가요?
저는개인적으로 김경민 선생님 수업이 가장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경민 선생님께서는 당근과 채찍이 분명하신 분이어서 잘한 부분은 크게 칭찬해 주시고, 못한 부분은 크게 비판해주시고 정말 오랫동안 세심하게 짚어주십니다. 이 기간 동안 옆에서 스포츠 코칭해주시듯이 퍼포먼스 부분을 세심하게 봐주시는데 주말을 시작하기에 파이팅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수업 자료를 들고 스터디도 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경민 선생님은 여러모로 5년 뒤에 닮아있고 싶은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0. 입시준비기간동안하루를어떻게보냈나요?
(수업, 자습, 스터디등, 기간에따라어떤비중으로나누어공부했는지등)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짧고 곱게 큰 스트레스 없이 수험생활을 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월수금 아침 6시 정도에 기상해 꼭 화장 칼같이 하고 옷도 입고 집에서 잠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2호선을 타고 학원에 왔습니다. 늦어도 8시 15분 까지는 학원에 와서 스터디룸을 예약했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원장님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하는 10시 까지는 신문이나 타임지를 읽거나, 워드스마트의 단어를 외우거나, 번역 일을 했습니다. 9시 40분이 되면 계단 나가서 꼭 입을 풀었고요. 통역 수업 듣기 전에 예열한다는 느낌으로 8시에서 10시까지는 꼭 학원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10시부터 1시까지는 수업을 듣고, 도중에 정말 안 풀리고 집중도 안되고 기분만 나빠진다 싶으면 쉬는 시간에 자료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료는 스터디파트너와의 학습자료로 사용했고요. 1시부터 3시까지는 스터디파트너와 스터디를 했습니다. 이 시간도 두 시간 컴팩트하게 스터디하기보다는 밥도 먹고, 서로의 멘탈도 추스리고, 그러고 나서 스터디를 했습니다. 스터디를 하면서는 ‘아 이런 말을 하면 날 미워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버리고 예리하게 발음, 어휘, 문법, 구조 및 모든 사항을 잡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와 민영이는 항상 양보다는 질이었습니다.
제가 학점 계산을 잘못 해서 2학점을 더 들어야 해서 금요일에는 학원 수업을 듣지 않고 학교에 가서 전문순차통역 수업을 들었습니다.
수험 기간 동안에 슬럼프가 오는 기간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 기간에는 학원에 오지 않고 영어 관련 활동을 했습니다. 집 근처 카페에 틀어박혀서 번역만 하거나, 또 저는 대학교에서 휴학기간 포함해 시사영어동아리 TIME 활동을 5년째 하는데, 이것 역시 굉장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2013년도에 조별과제를 하다가 학과 오빠 손에 끌려가서 처음 시작하게 된 저희 동아리 활동을 설명하자면 타임지 기사를 기반으로 학생들이 강의를 하는 형식입니다. 이런 강의가 매일 있습니다. 저는 ‘수험생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강의도 꼬박꼬박 가서 후배들 영어 및 시사상식도 짚어주고, 직접 강의도 하고, 한양대와 한 교환강의도 가서 대승을 거두고, 회식자리에서도 ‘우리 외대가 만만해서 저런 녀석을 강의자로 데려왔나?’ 하고 대승을 거두고, 우이동 MT 답사도 가고 (1차 시험 바로 전날), MT도 가고 (1차 시험과 2차 시험 사이 주말), 커버강의에 고별강의까지 알차게 했습니다.어메이징하게도 학원 수업을 복습 없이 듣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시사상식은 머릿속에 주입되어서 어떻게 21세기 인간이 이것도 모르냐, 하고 후배들을 가르칠 수까지 있었습니다. 확장까지 해서 ‘과연 트럼프의 이러한 관점은 타당한가?’와 같은 담론도 꺼낼 수 있었고요.
그리고 동아리에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부회장분이 계셔서 동아리 대소사와 갈등, 시사상식, 개인사를 영어로 논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은 정말 주옥같았습니다. 학교 중국어대 횡령 사건에 대해 대화하다가 ‘야 횡령이 영어로 뭐냐? 배임이랑 뭐가 다르며 왜 둘이 항상 붙어다님?’하고 찾아보고 메모하고 collocation을 강제로 공부했습니다. 강제로 묶인, 도망갈 수 없는 스터디파트너 같은 느낌이었어요. 공부하기 싫어서 학원 땡땡이 치고 학교 와서 또 공부하는 느낌….
동아리방에 앉아서 라이팅 연습도 했습니다. 힉원에서 몰래 가져온 큰 용지에 글을 쓰고, 또 썼습니다. 아마 저의 후배들은 ‘저 누나는 대체 뭐하는 누나인데 수업도 안 가고 매일 동방에 앉아서 누가 들어와도 인사도 안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글만 쓰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든 생각은 통대 입시 영어가 아예 다른 유형의 영어가 아니라 그동안 해온 것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타임지에서 읽은 구절은 라이팅에도 도움이 되고, 스피킹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런 형태로 문장을 써도 되는구나’ 하는 확신이 되고 새로운 가르침이 되기도 합니다. 그 논리 전개는 확장 글쓰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타임지를 잘만 공부하면 정말 읽을 맛이 나는, 예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도중에 나오는 시사 어휘는 2차 시험 대비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타임지는 정말 버릴 것이 하나 없는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판은 8,000원, 북미판은 12,000원입니다.

11.이창용어학원의담당선생님들께하고싶은말이있다면?
사랑하는, 사랑받는, 사랑스러운 저의 선생님들.. 제가 그간 수업도 맨날 빠지고 성실한 제자가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디 저희 후배들을 위해서 김경민 선생님 반을 증원해주시고 새벽부터 두 시간 줄 설 일이 없도록 수강신청 시스템을 개선해주세요. 스터디룸 대리예약 및 중복예약도 방지해주시고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12. 마지막으로입시를준비하는후배들에게하고싶은말이있다면?
저는 실용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저희학교교실에는시계가없습니다. 저는 6년간 이미 외대에서 학교생활을 해서 교실에 시계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학교 출신 분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다른 학교 출신 친구들과
친구:‘외대엔 도대체 왜 시계가 없어?’
나:‘학교에 왜 시계가 있어?고등학교야? 너네 학교에는 진짜 시계가 있어?’
하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괜찮았지만 시계를 준비하지 않은 다른 학교 분들은 적잖게 당황한 것 같습니다…..
시험감독관 분들도 저희 학교 교수님들이셔서 각 고사실에서 ‘20분마다 시간을 알려드릴게요’, ‘손 들면 시간을 알려드릴게요’ 등 통일되지 않은 반응을 하셨다고 합니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손목시계를 꼭 1차 시험에 차고 가세요. 꼭이요. 꼭.
둘째로, 1차 시험과 2차 시험 결과 발표가 나기까지의 시간은 정말로 괴롭습니다. 저는 이 기간 동안에 스터디파트너들과 모여서 하라는 스터디는 안 하고 아 떨어지면 어떡하지 진짜 마포대교 가나? 재수할 생각 있어? 난 낙장불입인데? 하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1차 시험에서 운명을 달리 한 친구들이 생기면 더더욱 심란합니다. 1차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서로 소식이 없으니 떨어졌나 싶어서 미친듯이 눈치를 봅니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정말 괴롭고 1차와 2차 사이와는 달리 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죽은 사람처럼 소리없이 지내야 합니다. 취미를 찾아도 손에 안잡히고 뭐 그냥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불면증까지 걸립니다. 2주 동안 면접 매 순간을 떠올리면서 ‘아 그때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을 하고 다른 대안까지 상상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셋째는 스터디 파트너입니다. 종교… 가치… 정치관… 맞지 않으면 스터디 파트너와 좋지 못한 작별인사를 하게 됩니다. 저는 종교적인 이유로 7월 말에 영원히 갈 것 같던 스터디 파트너 한 명과 크게 갈등을 빚고 헤어져 한 달 동안 공백을 가졌습니다. 그 분께서는 아예 1차에서 낙방했고요. 꼭… 잘 알아보고 충분한 대화를 통해 스터디 파트너를 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그 이후 만난 민영이는 큰 갈등 없이 수험생활의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민영이는 나중에 ‘아 언니가 만나자마자 종교는 뭐야? 엄마아버지는 뭐하셔? 어디 사니? 하고 물어봐서 당황했어…’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즐거운 수험생활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학원 스터디룸 안에만 틀어박혀 계시지 마시고 밥 든든히 좋은 거 드시고, 예쁜 거 보시고, 즐거운 일들을 하시며 효율적이고 찬란한 수험생활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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